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F-94 스타파이어 (문단 편집) === 실전에서의 F-94 === F-94B가 거둔 첫번째 격추는 매우 모호한 것이었다. 1951년 5월 24일에 [[도쿄]] 부근의 타치가와(立川) 비행장에서 [[C-119]] 수송기 한대(C-124라는 설도 있다)가 3명의 승무원과 2명의 미군을 태우고 이륙했다. 수송기의 기장은 이륙한 직후 중대한 기술적인 고장을 발견하고 복행을 결심했는데, 착륙장치가 한쪽만 펼쳐져 착륙이 여의치 않았다. 한동안 기체와 이리저리 씨름하다가 동체 착륙조차 어렵다고 판단한 기장은 모든 승무원과 승객들에게 탈출을 지시하고 자신도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렸다. 주인을 잃은 큼지막한 수송기는 이제 그 자체로 일본의 어디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폭탄이 된 셈이었고, 관제탑은 즉시 출격 대기중이던 F-94B 2대를 스크램블 발진시켜 통제할 수 없는 수송기를 요격하라고 요청했다. 이 가엾은 C-119이 마침내 해안을 넘어 육지 상공에 접어들자, 요격기 조종사들은 가까운 야산에 충돌할 것을 기대하면서 2시간이 넘게 조종사가 없는 수송기를 추적했다. 그런데 한쪽만 펼쳐진 랜딩기어 때문인지 수송기는 완만하게 선회하며 다시 바다쪽으로 돌아가고 있었고, 마침내 F-94에는 격추 명령이 떨어졌다. 두대의 전투기가 번갈아가며 수차례의 사격을 가하자 C-119은 불이 붙은 채로 바다에 추락했다. 이 얄궂은 아군기 격추가 F-94의 첫 전과인 셈이었다. 그후 같은 해에, 제68전투요격 비행중대의 F-94A는 잠시 한국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A형은 자신의 소중한 레이더가 적의 손에 들어갈 수 있음을 우려한 공군 사령부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라도 북한 상공으로 비행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적기를 조우할 일이 없었다. 제319전투요격 비행중대는 사용 기종을 F-94B로 전환한 다음 곧바로 수원에 배치되었지만 여전히 적의 영토를 통과하는 임무는 금지 상태였다. 유지 보수에 엄청나게 손이 가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휴즈]] 본사에서 한국으로 파견된 엔지니어들은 F-94의 레이더와 [[FCS]]에 대단한 지원과 노력을 기울여 결국 성공적인 가동률을 이끌어냈다. 서해 초도(椒島)에 설치된 제606 관제소의 노고 또한 야간 전투기 부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였다. 원래 이 작은 섬은 행정구역상 북한의 [[남포시]] 항구인 초도리를 이루고 있는 북한 영토였다. 1945년 광복 당시에는 [[황해도]] 송화군(松禾郡) 풍해면(豊海面)에 속해 있는 소사리(蘇沙里: 섬 동쪽)와 이현리(泥峴里: 섬 서쪽)로 엄연한 북한 땅이었는데, 1951년 5월 7일에 우리 해병대의 독립 41중대가 이 섬과 석도(席島)에 기습 상륙해 점령한 이후 즉시 레이더 기지와 항공 관제소가 전진 배치되었다. 해병대의 이 공로로 인해 UN군은 북한 영토 깊숙히 수백 km 바깥을 내다볼 수 있는 기막힌 망루를 손에 넣은 셈이었다. 섬의 지형이 험준하고 좁아 비행장을 건설하는 것은 무리였지만, 미군은 이곳에 [[헬리콥터]]와 [[비행정]] 부대를 파견하여 북한 상공에서 전투를 치루고 돌아오는 UN군기들 중 피해를 입거나 추락한 기체에서 탈출한 승무원들을 구조하는 탐색/구난 기지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수행했다. 이 기지는 1953년 7월 27일에 한국전의 정전 협정이 발효되면서 철수할 때까지 미 공군과 해군, 해병대 및 모든 UN군 소속 항공기들에세 서쪽 국경의 항적 정보를 제공하고 공중전을 통제하는 관제소와 수십명의 조종사들을 구출하는 구조본부로써 지대한 공을 세웠다. 당연히 북한군에게는 눈엣가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낮에는 Tu-2나 [[Il-2|Il-10]]에 의한 공습이 시도되었고, 밤에는 [[Po-2]]로 소리없이 날아와 폭탄을 떨구고 도주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전투에서 F-94의 사용에 대한 제한은 1953년 초엽에나 해제되었고, 오랫동안 칼을 갈고 있던 제319전투요격 비행중대원들은 금새 상대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1월 30일 F-94B "51-5449"에 탄 벤자민 피디언 대위와 리온 중위는 남한 상공으로 침입하다가 발각되어 아군에 의해 요격을 받고 있는 [[라보츠킨]] [[La-9]] 전투기를 발견하고 함께 요격에 나섰다. 이 미확인기는 우군의 교신에 응답하지 않고 계속 남으로 비행하고 있었다. 레이더 조작수 리온 중위는 남포항 부근 초도 상공에서 레이더 컨택을 보고했고, 벤자민 대위가 그의 유도에 따라 접근하자 갑자기 코앞에 적기가 나타났다. 대위는 느린 속도로 날고 있는 레시프로기를 추월하지 않기 위해 급히 에어브레이크를 펼치는 동시에 전탄 사격을 가했다. 이 사격은 육안이 아닌 레이더에 의지한 것이었으나 신형 AN/APG-40 레이더는 기총의 타격점을 아주 정확하게 표시해줄 수 있었고, 4정의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 토하는 탄막 세례를 받은 La-9은 조종사가 탈출할 틈도 없이 그대로 폭발하며 잔해는 바다에 추락했다. 의심할 나위 없는 격추로, F-94가 적기를 상대로 거둔 첫 공식 전과였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 배치된 F-94들은 3대의 확인 격추를 달성했다. 1953년 5월 10일에 존 필립스 대위와 빌리 애토 중위는 서해 초도에 설치된 제606 관제소의 통제를 받으며 미그 협곡을 향해 3만 피트에서 4만 피트 고도로 완만하게 상승중이었다. 후방석에 앉아 먹물처럼 검게 펼쳐진 무월광 상태의 밤 하늘을 둘러보며 사방을 경계하던 애토 중위는 문득 3천 피트 밑에서 희미하게 번뜩이는 제트엔진의 배기 불꽃을 육안으로 목격했고, 필립스 대위에게 주의를 환기하며 레이더를 수동 모드로 바꿔 목표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곧 중위는 2천 피트 아래에서 비행 중인 목표를 발견했으나 전자장비로 기종까지 식별할 수는 없었다. JOC에 부근을 비행하는 우군기가 있느냐고 묻자,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고, 곧바로 사격 허가를 얻어낸 이들은 불꽃을 토해내는 테일 파이프를 기준점으로 삼고 강하를 개시했다. 하지만 첫번째 일격을 맞고도 용케 격추를 면한 미그기는 갑자기 급격히 좌선회하며 회피 기동을 펼쳤다. 순식간에 레이더 스코프에서 목표를 놓친 이들은 지상관제소의 도움을 받아 다시 목표의 후미에 붙을 수 있었다. 조종사 필립스 대위는 만에 하나라도 레이더가 표적을 놓치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나이트 비젼의 스위치를 켰다. 아무것도 보이지는 않았으나, 불시에 조종간을 꺾어가며 지그재그로 날며 후방을 살피는 미그기 조종사는 신참이 아니었음에 분명했다. 밤 하늘의 끈질긴 숨바꼭질은 사냥감과 사냥꾼이 만주 상공에 접근할 때까지 이어졌지만, 마침내 필립스 대위가 재차 방아쇠를 당겼고 발사된 총탄은 미그기를 그대로 공중에서 찢어버렸다. 이것은 미 공군의 제트전투기가 야간에 같은 제트전투기를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다. F-94의 마지막 전과는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1953년 6월 7일 22시 45분에 제319 전투요격 비행중대의 지휘관 로버트 V. 맥헤일 소령과 새뮤얼 호스터 대위가 [[압록강]] 상공에서 MiG-15를 격추한 것이었다. 하지만 맥헤일 소령과 호스터 대위는 이 전투에서 지나치게 급선회하며 무리하게 적기를 쫓다가 자신들의 F-94 "51-5503"이 실속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어 추락하고 말아 이 격추에 관한 주장은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